동방한학연구원장
쟁선기서(爭先棄書) - 앞다투어 책을 버린다
지난 2013년 서강대학교(西江大學校)에서 도서관 장서 가운데 5만 권을 뽑아 학교 복도에 전시하고서 교수 학생 직원 일반시민들에게 한 권에 5백 원에 팔았다. 남은 것은 폐기처분했다. 필자가 그 사실을 듣고서 현대판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글을 써서 비판한 적이 있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인류가 개발한 발명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 책이라고 하는데, 이름 있는 대학 도서관에서 주동적으로 책을 버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버릴 책을 사진을 찍은 것을 보니, 여러 대학 교수들의 대표적인 저서도 들어 있었다. 더욱 놀랄 일은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저런 책을 누가 5백원 주고 사갈 거라고 진열해 놓았나?”라는 말을 하는 것을 어떤 기자가 들었다.
그런데 근래에 알았는데, 서강대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서울의 이름 있는 대학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좋은 대학이라고 홍보하는 대학 30여 곳에서 책을 10만 권에서 수천 권까지 버렸다는 사실이다. 대학 도서관 사서 가운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도서관의 장서를 폐기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한 사람도 있었다.
최근 울산의 어떤 대학에서는 도서관 장서의 반을 폐기할 방침을 세우고 진행중이라 한다. 도서관을 전자화 현대화 쾌적화한다는 방침하에, 시청각 기기를 들여놓고, 학생들이 차를 마시면서 노트북을 사용할 공간을 마련하려는데, 공간이 부족하여 장서를 없앤다고 한다.
대학 도서관에서 왜 이렇게 책을 없애려고 하는가?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간을 더 늘리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겠지만, 대학 안에서 도서관은 아무 힘이 없기 때문에, 공간을 증축할 예산을 배정 받을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공간이 부족하고, 공간이 부족하니, 귀중한 장서를 폐기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된다.
미국에서는 각 대학 예산의 5% 이상을 도서관 예산으로 잡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평균 1%에도 못 미친다. 전국 370여 개 대학 가운데서 2백여 개에 가까운 규모가 작은 사립대학에는 도서관이 아예 없다. 세계에서 인구 비례로 대학진학률이 제일 높은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현실이다.
장서를 없애면 어떤 방식으로 없애느냐 하면, 대부분의 대학 도서관에서는 열람하는 빈도수에 따라 결정한다. 30년 동안 아무도 한 번도 열람 안 하는 책, 20년 동안 한 번도 열람 안 하는 책, 10년 동안 한 번도 열람 안 하는 책 순으로 폐기한다.
그러면 여기에 해당되는 책은, 주로 인문학 고전이다. 인문학 고전 가운데는 한문이나 영어 등 원어로 된 책이 대부분인데, 그런 종류의 책은 원래 학부 학생들은 열람하기 어렵고, 그 분야를 전공하는 대학원생 이상, 교수들만 열람하게 되어 있어 열람자가 많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국의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이 열람자가 거의 없는 책에 속하여 없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대학도서관이라면 꼭 갖추어 두어야 할 기본도서가 있다. 열람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 먼 훗날 귀중한 보물이 되는 것이다. 데이타 베이스에 수록되어 있다고 종이 책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사상가 카알라일은 “진정한 대학은 도서관이다.”라고 했다. 중국 출신으로 미국 유럽 등지에서 교수를 지낸 임어당(林語堂)은, “어떤 대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자 하면, 그 대학 도서관에 가 보라.”는 말을 했다.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도서관은 대학의 맹장(盲腸)이다.”라는 자조 섞인 말을 자주 한다.
장서를 앞 다투어 폐기하는 분위기에 따라 정말 좋은 책들이 알게 모르게 사라진다. 대학 총장이나 교육부 장관 등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특단의 조처를 취하기 바란다.
[*. 爭 : 다툴, 쟁. *. 先* : 앞, 선. *. 棄 : 버릴, 기. *. 書 : 책, 서. 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