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동범(龍華同泛), 용화산 아래서 함께 배를 띄우다
193미터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면서,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에 있어 아주 유명한 산이 있다. 함안군(咸安郡) 동북 모서리인 대산면(代山面)에 있는 용화산(龍華山)이다. 이 산의 동쪽에는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한 낙동강(洛東江)이 남북으로 흐른다. 이 산의 북쪽에는 지리산(智異山), 덕유산(德裕山)에서 발원한 남강(南江)이 흘러와 낙동강과 합수한다. 동쪽은 창녕군(昌寧郡), 북쪽은 의령군(宜寧郡)이다.
지리적으로 단순히 낙동강 물과 남강 물이 만나는 곳만이 아니다. 퇴계학(退溪學)과 남명학(南冥學)이 만나는 융합(融合)의 문화가 있는 중요한 곳이다. 경상좌도(慶尙左道)와 우도(右道)의 학문과 문화가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함안의 선비들은 퇴계학과 남명학을 다 접할 수 있었다. 함안 출신의 황곡(篁谷) 이칭(李偁), 죽유(竹牖) 오운(吳澐) 등이 퇴계 남명 두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며 두 선생의 장점을 다 흡수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 뒤를 이은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는 철저하게 남명과 퇴계 두 선생을 극도로 존모(尊慕)하면서 두 학파의 융합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퇴계 남명 두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며 두 선생의 장점을 다 배운 대표적인 학자가 한강(寒岡) 정구(鄭逑)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는데, 저서가 대단히 많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73세 되던 해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저서를 다 태워버렸다. 그 때 한강은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탄식할 정도였다. 그런데 흩어진 저서를 모으고, 노년에 새로 지은 시문까지 합하여 지금 20여 책의 저서가 남아 있으니, 대단한 학자다.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을 때 고향 친구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추천으로 벼슬에 나가게 되었다. 지방 고을원 자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80년 창녕(昌寧) 군수로, 1586년에는 함안(咸安) 군수로 부임하였다.
한강은 고을원으로 부임하면 먼저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그 지역 출신의 선현을 선양하고,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읍지(邑誌)를 편찬했다. 한강이 편찬한 대부분의 읍지가 없어졌지만, 함안의 읍지인 '함주지(咸州誌)'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 최초(最初)의 읍지고,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유일한 읍지다.
1607년 한강이 자기 질서이자 후배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대동하고, 자신이 20여 년 전에 다스렸던 함안과 창녕 사이에 있는 용화산 아래로 성주(星州)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이 지역의 한강의 제자, 옛날 고을 원일 때 사귀었던 선비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임진왜란 때 대표적인 의병장인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선생도 합류하였다. 모두 35명이었다. 35명 가운데 12명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다.
사흘 동안 낙동강 위에 배를 띄우고 학문을 논하고 세상일을 이야기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동정하며 지냈다. 망우당을 비롯하여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국가를 구해낸 선비들이 임진왜란이 끝나자, 공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모두 다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은자가 아니기에, 임진왜란 이후에 피폐한 세상과 가난한 백성들을 걱정하였다.
북송(北宋) 때 학자 문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1082년 적벽(赤壁)에서 뱃놀이하며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것을 기념해서 우리나라에서도 곳곳에서 적벽선유(赤壁船遊)를 한다. 용화동범은 학문적으로 문화적으로 적벽선유에 못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또 용화동범의 전통은, 1961년까지 계속 이어져 왔다.
용화동범에 참여한 35명의 후손들이 모현계(慕賢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4백년이 넘은 지금까지 선조들의 우의(友誼)를 새겨 이어가고 있다. 친형제도 싸우는 지금 세상에 선조들끼리 우의가 있다고 4백 년 넘도록 이어가는 아름다운 정신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가야 할 거룩한 일이다.
용화산은 단순히 낙동강 서쪽에 있는 경치 좋은 산이 아니다. 거기에는 학문이 있고, 충절이 있고, 도덕이 있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학문이나 도덕과 애국을 대표하는 산이다. 학문 도덕 애국을 선양할 수 있는 본산(本山)으로 발전되었으면 좋겠다.
[*. 龍 : 용, 룡. *. 華 : 빛날, 화. *. 同 : 한 가지, 동. *. 泛(=汎) : 띄울, 범. 넓을 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