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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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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한학연구원장


불지기서(不知其暑) - 그 더위를 알지 못 한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 1501-1570) 선생께서 43세 되던 1543년 주자(朱子)의 문집인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처음으로 입수하였다. 조선이 주자학(朱子學)을 숭상하는 나라이지만, 󰡔주자대전󰡕은 1543년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주도로 처음 간행되었다. 국가에서 큰 경비를 들여 한 사업이지만, 간행한 부수는 겨우 20부였다. 그 당시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먼저 국가의 사대 사고(史庫), 경연(經筵),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성균관(成均館) 등에 배부하고 나니,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여분은 거의 없었다. 퇴계선생은, 교정에 지대한 공헌이 있었기 때문에 한 부 입수할 수 있었다. 충재(冲齋) 권벌(權橃)은 경연에 출입했으므로 중종(中宗)이 한 부를 하사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훗날 인종(仁宗)이 된 왕세자의 스승이었으므로 한 부 하사 받았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고 '주자대전'을 구하여 비치하려고 지성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 했다.


  퇴계선생은, 이 책을 입수한 뒤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이 책을 연구하기 위해서 고향 퇴계(退溪)로 돌아왔다. 문을 닫고 방안에서 계속 책을 읽었다. 더운 여름 내내 그만두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더운 여름에 몸 상한다고 조심하도록 했다. 그러자 선생께서는, “이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시원한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낀다. 내 자신 덥다는 것을 알지 못 하는데, 무슨 병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너무나도 몰입 집중하여 독서를 했기 때문에 날씨가 더운지 추운지 전혀 몰랐다. 1289년 회헌(晦軒) 안향(安珦) 선생이 주자(朱子)의 저서 일부를 베껴 가지고 온 것이 우리나라에 주자의 저서가 들어온 시초였다. 그 뒤 '사서집주(四書集注)', '성리대전(性理大全)' 속에 주자의 글이 군데군데 보이지만, 주자의 시문(詩文) 전모를 볼 수 있었던 것은, 1543년 이후의 일이었다. 비로소 주자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전반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적 열정이 대단한 선생은, '주자대전' 95책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정밀하게 독서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마침내 “점차 그 말에 맛이 있고 그 뜻이 무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특히 서찰에 대해 느낀 바가 있었다.(自是, 漸覺其言之有味, 其義之無窮, 而於書札也, 尤有所感焉)”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요긴한 주자의 서간(書簡)을 뽑아 모아 1558년에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다. 일반 학자들은 󰡔주자대전󰡕을 입수할 수도 없고, 입수한다 해도 다 읽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다. 퇴계선생이 더위를 잊고 '주자대전'을 연구하여 요약본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선생은 '주자대전'을 읽은 이후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나가도 잠깐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덥다고 일을 버려두고 피서(避暑)만 다니면,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다. 피서한다고 다른 곳으로 가지만, 그 곳에도 더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더위 자체를 잊고 자기 할 일하는 퇴계선생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좋겠다. 이런 방식으로 더위를 잊는 것을 옛 어른들은 망서(忘暑)라고 했다. 아무리 더워도 가을이 오지 않은 해은 없다. 길면 두 달, 짧으면 한 달 동안의 더위를 지나면, 곧 바로 추위 걱정해야 할 판이다. 덥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 것은 없지 않겠는가?

 

[*. 不 : 아니, 불. *. 知 : 알, 서. *. 其 : 그, 기. *. 暑 : 더울, 서. 더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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