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한학연구원장
흥학유공(興學有功) - 학문을 일으키는 데 공적이 있다
1543년 풍기군수(豊基郡守)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 선생이 순흥(順興)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다. 향교(鄕校)가 있는데 왜 꼭 서원을 지어야 했을까? 성균관(成均館)이나 향교에서는 옳은 교육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옳은 스승이 없는 것과, 학생들이 참된 공부보다는 과거시험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공부를 하는 학교인 서원을 만든 것이다. 창건 뒤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하도록 전답도 마련하고 도서도 구비했지만, 완전히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백운동서원을 사액(賜額) 서원으로 만들어 완전히 운영하는 데 아무런 애로가 없도록 한 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선생이었다.
1543년에 서원 창건으로 우리나라는 학문이 있고, 문학이 있고, 윤리도덕이 지켜지는 학문적 도덕적으로 우수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선비정신의 탄생과 발전도 그 근원지는 서원이다.
1543년 서양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했고, 일본에서는 조총을 생산한 해이다. 다른 나라는 과학기술에 힘쓰는데 우리는 서원이나 창건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학문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신재 선생은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늘 왕에게 강의하는 경연(經筵)의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나라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으로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간 인물이다.
신재 선생보다 네 살 많은 분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591~1553) 선생이다. 퇴계,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두 선생은, 여섯 살 적다. 동시대 워낙 뛰어난 대학자가 많았기에 신재 선생은 학문과 행적이 알려지기 쉽지 않았다. 신재 선생은 퇴계, 남명, 회재 등 세 선생과 학문적 교류를 통해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다.
신재 선생이 관직에 오래 있었다고 학자가 아닌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최고로 영광스러운 관직은 대제학(大提學)이지만, 대제학은 겸직(兼職)이고, 홍문관(弘文館)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는 부제학(副提學)이다.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하면 그 인물의 학문과 문장이 그 시대 최고라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다. 신재 선생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신재 선생은 유학 연구와 보급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 경제 문제에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당시 풍기고을은 중국에 조공할 산삼을 바쳐야 했기에, 백성들이 산삼을 캐느라고 농사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신재 선생이 산삼 재배법을 최초로 성공시켜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줬다.
지금까지 동시대 다른 학자들에 비하여 신재 선생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작년에 경북대학교에서 김장환(金章煥)이란 분이 신재 연구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앞으로 신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연구소가 신재 선생의 고향 가까운 우리 지역의 국립대학에 설치되었으면 좋겠다.
*興 : 일으킬 흥. *學 : 배울 학. *有 : 있을 유. *功 : 공적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