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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선생님께서 전달하신 내용입니다]

 

산베고 누운 구름

>454년 전 마지막 귀향, '선한사람, 많은세상'!

-7차례 사직, 60회나 사퇴서 낸 역대급 진퇴관의 퇴계 이황 선생  

-경복궁~안동 도산서원까지 270걷는 1314일 간 대장정

-도산서원장 겸 선비수련원장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장의 역작!

454년 전, 퇴계 이황 선생은 임금 선조에게 마지막 사직 상소를 올렸다.

156934, 한사코 그를 옆에 두려던 선조는 마침내 포기를 한다.

마침내 노구의 퇴계 선생이 직을 떠나도 좋다는 윤허를 내린 것이다.

69'하늘의 별'이 되기 1년 전, 그는 향리 도산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퇴계 선생의 그 마지막 귀향길재현 행사가 27일 경복궁에서 열렸다.

경복궁 사정전 앞에서 열린 개회식에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이철우 경북지사, 김형동 의원, 권기창 안동시장, 정문헌 종로구청장, 정종섭 전 행안부장관 등이 참석했다.

이치억 퇴계 차종손과 김종규 문화재국민신탁 이사장, 오종남 전 통계청장 등도 나왔다.

행사 총괄은 도산서원장 겸 선비수련원장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장이 올해까지는 맡았다.

2019년 처음 시작한 재현 행사는 올해로 4번째(2020년 코로나로 중단)를 맞았다.

도산서원 주도, 민간차원으로 하다 김병일 원장 건의를 이철우 지사와 권기창 시장이 받아들여 경북도와 안동시가 주최하는 식으로 정리했다.

도산서원까지 276를 걷는 14일 간 여정에는 초중고생 17명을 포함해 퇴계학을 공부하는 학자와 다른 학파의 후손 등 45명이 참여했다.

첫날 개회식에는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향토 극단 광장이 마지막 귀향 전, 선조와 퇴계가 '물러나겠다,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는 사퇴와 만류의 밀당을 극적으로 그려내 박수를 받았다.

앞서 안동 MBC어린이합창단과 성인합창단 콜라보레이션으로 도산12곡가를 불러 감동을 자아냈다.

 

첫수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료

초야우생이 이렇다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을 고쳐 무엇하료

....

12번째 수  

우부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

 

임금의 자세를 강조한 '성학십도'를 남기고, 백성에겐 도산12곡을 선물한 선생.

첫날 귀향길 재현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출발, 두모포(3호선 옥수역 부근)까지 8km를 걸었다.

재현단은 퇴계 선생이 걸어간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질박한 삶과 참선비 정신을 되새겼다.

퇴계의 귀향길 재현 행사의 산파역은 단연 김병일 원장이 꼽힌다.

마지막 귀향을 기준으로 450주년인 2019년을 앞두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장관에서 물러난 뒤 그는 한 눈 팔지 않고 퇴계 정신 계승의 외길을 걸었다.

도산서원장과 선비수련원장을 겸해 100만 명 넘게 가르쳤다.

여러 학자나 연구자들과 함께 퇴계 정신을 이어받는 참공부도 했다.

그러나 꺽어지는 해 450주년, 심포지움에 그쳐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뭔가 타는 듯한 목마름이 그의 가슴에 치밀어 오른 것이다.

밤잠 설치다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을 재현해보자는 생각이...

도산서원과 선비수련원 사람들 의견을 물어본 결과, "대찬성"이었다.

그렇게 귀향길 재현 행사는 김병일 원장의 숙고와 고심의 산물이다.  

도산서원과 선비문화수련원 주최로 열린 행사는 이듬해 중단됐다.

쳐죽일 코로나 탓이다.

하지만 행사를 해달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빗발쳐 2021, 2022년에는 참가 인원을 줄이고 유튜브 원거리 중계로 다시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귀향길을 따라 다음 달 9일까지 하루 평균 20를 걷는다.

귀향길 행사는 그냥 고행하듯 또는 수행하듯 걷기만 하는 게 아니다.

후학들에게, 어린 사람들에게는 '걸어가는 학교''걸어가는 대학'이다.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와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가 걸어가는 강사들다.

퇴계가 서원 운동을 펼친 까닭, 당시 선비 사회가 어땟는지를 묻고 배운다.

완주할 초중고생 17명은 석학들에게 삶과 공부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조이현(인성-영성학교 재학, 2) 학생은 이광호 교수에게 날카롭게물었다.

'철학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본질을 캔다는 뜻에선 철학적 질문을 던진 거다.

그는 서양철학을 가르치다 한계를 느껴 퇴계 사상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퇴계 정신을 오래 탐구해온 그의 답도 참으로 철학적이다.

"마음으로 한다. 마음이 지면, 무엇도 할 수 없다. 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퇴계 선생도 말했다. '하늘마음(천심)"을 공부하라고 말이다.

하늘마음을 누구나 (본성으로) 지니고 있으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하늘마음을 배우고 깨우치며, 흐릿해지면 깨끗이 닦아야 한다.

그 목표는 선하게 사는 것일 거다.

몇 년 전, 하룻밤 유숙한 선비수련원 벽에 적힌 '선한 마음' 글씨를 봤다

김병일 원장의 꿈도 퇴계 선생의 선비 정신과 한 길로 맞닿아 있다.

'선한 사람, 많은 세상'을 이 땅에 어떻게든 구현해보려는 것일 테니.

퇴계 선생을 비롯한 조선 시대 참선비들이 추구한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선비 정신은 결코 케케묵었거나, 어렵고 복잡한 그 무엇이 결코 아니다.

재현 행사는 선생의 가르침이 아직 쟁쟁한 도산서원에서 49일 마친다.

안동 도산서원에 이르는 700리길에 남아 있는 그의 삶과 정신을 배워 오늘에 되살리려 한다.

그 선한 영향력을 널리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퍼지듯 확산시켜 나갈 한 생각을 모으려 할 뿐이다.

그래서 선한 사람이 많은 아름다운 세상을 활짝 꽃 피우려고 한다.

임금이 붙잡아도 물러날 때를 아는 그의 진퇴관(진퇴관)은 감동이다.

참가한 어린 학생들이 퇴계 선생의 이런 정신을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

선비정신의 맑은 기풍을 우리 사회에 진작할 지름길이 바로 그곳에 있다.

행사를 주최한 두 단체장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퇴계 선생이 세운 서원으로 인재들이 몰려들어 지방 경제에도 좋은 영향을 줬다. 그의 사상과 실천은 오늘날 지방시대와도 맞닿아 있다."(이철우)

귀향길이 선생의 가르침을 깨우치는 길이지만 자연과 인문을 아우르는 새로운 걷기 문화의 개화도 기대한다.”(권기창)

퇴계 선생이 선조에게 사퇴 상소를 한 야대청이 바로 경복궁 사정전이다.

퇴계는 선조가 즉위한 이듬해 1568년 조정이 거듭 부르자 상경할 수밖에 없었다.

대제학으로 임금을 보필했으나, 낙향해 제자를 기르며 만년을 보낼 생각이었다.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한 끝에 156934일 일시 귀향 허락을 끝내 받아냈다.

제수받은 판중추부사 사직 뜻을 거듭 밝히자 끈질기게 붙들던 선조도 허하고 만다.

그래서 마지막 귀향길 재현단의 출발지가 경복궁 사정전으로 된 것이다.

서울 행정 책임자인 오세훈 시장도 한마디를 했다.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선생이 지킨 공경 배려 존중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오세훈)

경복궁을 빠져나온 후 선생은 마른내골(건천동) 집에 잠시 들렀다가 바로 도성을 나왔다.

한강의 두뭇개나루로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뭇개의 나루는 1980년대 한강 개발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다행히 근처에 나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두뭇개나루터공원이 있다.

여기서 첫날, 재현단은 8km를 걷는 일정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은 이곳에서 봉은사까지 7km를 다시 걷게 된다.

퇴계는 남한강을 거슬러 충주까지는 관선을 이용했다.

이후에는 말을 타고 죽령을 넘어 도산서원에 이르렀다.

69, 요즘 같으면 80중반 노장이라 걸어 가기에는 무리였다.

퇴계 가르침이 454년 뒤까지 울림이 큰 까닭은 실천 정신이다.

선비 정신의 몸소 실천, 바로 그 지행합일로 선생은 우뚝하다.

마지막 귀향의 윤허도 참으로 성심을 다해 간신히 받아냈다.

"뼈다구라도 향리에 묻게..."고 임금에게 진심으로 요청한 거다.

그 전() 15687, 17세 선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상경했다.

여러 달, 아침 낮 저녁 경연에서 임금을 가르치고 보필에도 성심을 기울였다.

임금이 실천하고 지켜야 할 군왕의 참된 자세를 그림으로 쉽게 서술해 올렸다.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성학십도'.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긴 선생은 그해 12월 직을 거둬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조정은 우찬성, 이조판서를 비롯한 고위직을 계속 내려줘 만류했다.

벼슬에 관심이 없었던 선생은 상소를 올리며, 조정에 아예 나가지 않았다.

서너 달을 끌던 선조는 선생의 고집을 꺾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일시 귀향에 성공한 것이다.

그때 선조는 성학십도의 뜻을 재차 물었다.

'바른 정치를 위하여 올바른 인재를 등용할 것과 기묘사화 이후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고 부당하게 쫓겨난 사람들을 불러들일 것, 임금 자신이 학문에 열중하여 덕성을 기를 것' 등이라고 선생은 답했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에서 바로 쓸만한 인재들도 천거해달라고 했다.

이준경 기대승을 천거했다.

조정을 떠나는 날까지 선생은 '바른 정치'를 위해 진언을 아끼지 않았다.

'착한 사람, 많은 세상'을 위해 과연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 건가?

퇴계 선생이 남긴 화두를 놓고 재현단은 걸으면서 사색 또 사색해야 한다.

남양주, 여주, 충주, 단양, 영주를 거쳐 매일 평균 20km를 걷게 된다.

선생 발자취를 따라 걷는 남한강 강변길과 죽령 옛길은 풍취가 빼어나다.

선생이 임금의 만류를 결국 뿌리치고 결국 물러남의 길을 택한 까닭은?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착한 사람, 많은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향리로 돌아가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학문을 닦고, 참 선비들을 길러내며 만년을 보내려는 각오였다.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여정에 나도 동참했다.

도포와 갓을 차려입고 두뭇개나루까지 걷는 동안 맑은 기운에 휩싸인다.

안동이 지역구인 김형동은 막장 드라마를 쓰고 있는 정치판에 일갈했다.

"의원 100명만 이 행사에 나와봤다면, 퇴계 선생의 선비정신을 새긴다면 정치권의 막장드라마나 극단적 충돌과 갈등도 없을 텐데..."

선조의 끈질긴 만류에도 직에서 물러난 퇴계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안동까지 걸어본 이는 "심신이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졌다"고 했다

2번째 기소를 당하고도, 직에서 물러나긴커녕 방탄용 반일 공세나 편다.

거야 대표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좌와 우로 갈라치는 망동을 계속한다.

선생이 되살아나셔서 대한민국 정치판의 이 난리굿을 본다면, 뭐라 칼까?

아무튼 올해 처음으로 경북도와 안동시가 나서, 행사 규모는 더욱 커졌다.

내년,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 행사엔 윤석열 대통령도 나왔으면 한다.

남북 분단보다 더 지독한 남남 간 갈등을 해결할 길은 당체 없다는 말인가?

하늘마음을 공부하는 선비 정신에 우리사회의 난제를 해결할 길이 있다고 본다.

'선한 사람, 많은 세상'을 꿈꾼 퇴계 선생의 귀향길에 반드시 그 답이 있을 테니까.

마지막 귀향길을 걸어가다 보면, 퇴계 선생이 남긴 향기가 코끝에 풍겨올 거다.

꼿꼿한 선비 김병일 원장의 몸과 마음에도 '퇴계 향내'가 진하게 배어있는 듯하다.

1314일 완주할 45명 모두가 무병무탈하게 끝까지 걷기를 기원드린다.

특히 17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꼭 완주하라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퇴계의 길'을 걷고나면 학생들 모두 정신적 키가 훌쩍 커져 있을 거다.

 

이만총총(계속)

 

#뱀발...성학십도

 

퇴계의 성학십도17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에게 68세의 노대가가 바로 즉위 원년에 올렸던 상소다.

선조가 성왕(聖王)이 될 수 있는 가르침으로  온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간절히 바라는 우국충정에서 저술된 것이다.

'성학십도라는 명칭은 본래 진성학십도차병도 進聖學十圖箚幷圖>퇴계문집내집과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진(·병도의 글자를 생략해 성학십도로 불린다.

성학십도는 서론이 담긴 진성학십도차에서 시작해 태극도 등 10개 도표와 해설로 돼있다.

진성학십도차에서 이황은 성학에는 커다란 단서가 있고, ……백성의 지도자가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징조가 연유하는 곳이고,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온갖 욕심이 잡다하게 나타나는 자리이고, 가지가지 간사함이 속출하는 곳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해 방종이 따르게 된다면, 산이 무너지고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는 것 같은 위기가 오고 말 것이니, 어느 누가 이러한 위기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애틋한 마음가짐으로 날마다 생활을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라며 상소의 동기를 밝힌다.

이황은 왕 한 사람의 마음의 징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음가짐을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삼가는 '()의 내면화'를 중요시했다.

10개의 도표 가운데 7개는 옛 현인들이 작성한 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골랐다.

나머지 3개는 퇴계 선생이 작성했다. 2개의 도표에서 이황은 사단칠정(四端七情)과 이기(理氣)의 내용을 곡진하게 도해로 설명했다.

 

첫째날에 이어 최영훈 전 동아일보 국장님의 퇴계 귀향길 재현 행사 2~3일차 소감을 자세하게 적어주셨습니다. 그 내용을 공유하오니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산베고 누운 구름

>퇴계(퇴계) 귀향길, 눈물겨운 송별시들!

-조정 중신들과의 '저자도 송별연' 길어져 봉은사에서 1박 유숙

-평생 받은 3000여 통 서신 중 573(18%) 귀향 후 받아 답신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퇴계 선비정신, 세계적 보편성 갖춰!

 

454년 전,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길 재현 행사 이틀째.

전날 해산한 두뭇개나루터에서 재현단은 아침에 모였다.

김병일 원장은 출발 전 인사말로 "우리는 착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민들레 홀씨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둘째 날, 지금은 사라진 모래섬인 저자도로 중신들이 왔다.

선생과 이들이 시를 주고받으며 진행한 송별연은 애틋했다.

진정을 주고받은 이별 노래가 길어지는 바람에 선생은 멀리 못 가고 강 건너 봉은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져야 했다.

그래서 이날 퇴계와 불교의 만남이 주된 소재 중 하나였다.

재현단은 봉은사 공양간 향적원에서 맛나게 소찬을 들었다.

석탄일을 앞두고 울긋불긋 하얀 연등들로 경내는 눈부셨다.

김병일 원장과 대표들은 주지 스님이 주석하는 곳으로 갔다.

원명 스님과 차담 중에도 당시 퇴계 선생의 행적을 추념했다.

김병일 원장이 먼저 봉은사 측에 감사부터 극진하게 표했다.

"행사 때마다 봉은사에서 극진하게 환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 향리인 안동에서는 절을 훼손한 사례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원명)

원명 스님은 감기 기운으로 몸이 불편한 데도 한참 차담을 이어갔다.

나는 전날 잠이 부족해 차담 때 잠시 졸아 대화를 잘 듣지 못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김종규 형은 이틀째 봉은사로 왔다.

교육 담당 덕산 스님이 주재한 자리에서 인사말을 절묘하게 했다.

"덕산 스님이 '어린 학생들이 작년보다 많아진 게 참 좋게 보인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려면 이렇게 돼야 한다'고 한 게 너무 맞는 말씀이다. 나는 짧게 하겠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내, 초중고생 17명에 해당하는 17만원, 5만원권(신사임당) 3장과 1만원권(세종대왕) 2장을 꺼내 조이현 학생에게 건넸다.

다른 일정으로 먼저 자리를 떠난 김종규 이사장은 나중에 전화를 김병일 원장에게 다시 했다.

"내가 실수를 했다. 시간이 없는 바람에 학생들에게 신사임당과 세종대왕을 줬는데, 원장이 은행에서 돈을 바꿔 퇴계 선생(1000원 권)으로 170장을 마련해 다시 나눠달라"고 했단다.

참 기지가 넘친다.

어제, 경복궁 사정전 만춘전 앞에서 말할 때도 기지를 발휘했다.

조용헌의 신문연재 칼럼(퇴계 선생 소재)을 돌리며 상찬한 것이다.  

앞서 454년 전, 퇴계 선생과 선생을 송별하러 동호로 나온 조정의 중신들이 시를 주고받은 애틋한 송별연을 재연했다.

퇴계 선생과 27살 차로 학문적 동지요 애제자 고봉 기대승 후손 세 분이 몸소 이곳으로 의복을 정제하고 찾아왔다.

고봉 선생이 당시 퇴계 선생에게 바친 송별시를 후손들이 창수(창수)했다.

퇴계 선생의 차운 시는 다른 후손이 창수해 도저한 풍류의 멋을 재연했다.

454년 세월이 흐르고 흘렀건만, 또한 한강변은 상전벽해를 하였건만 마지막 귀향길이 눈앞에 되살아난 듯했다.

동호대교 북단 두뭇기 나루터 인근은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여 그 모습이 호수 같다 해서 동호라고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70년 초 강남 개발 당시 골재 채취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송별시연을 하며 애틋하게 석별의 정을 달래던 저자도 역시 물밑에...

454년 전 퇴계 선생은 나룻배를 타고 건넜을 거다.

재현단은 동호대교의 인교 쪽을 걷고 또 걸어 건너편으로 갔다.

봄 물이 오른 강변 느티나무와 활짝 피어난 하얀 벚꽃들에 눈이 부셨다

동호대교 남단으로 건너오자 아침 기러기 몇 마리가 힘찬 날개짓을 한다.

물가에 착륙한 기러기들은 오래 동안 깊이 자맥질 하며 먹잇감을 찾는다.

한문의 대가로 통하는 허권수 경상대 명예교수와 이광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창수한 시가들을 멋지게 해설했다.

아참, 퇴계선생께서 차운해 지은 시 중 학봉 김성일이 지은 시는 후손 김종성이 구성지게 창수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연 전에 그이에게서 학봉을 기린 책자를 선물받아 읽어봤다.

학봉 선생과 제봉 고경명 선생 집안은 세교를 오래 했다.

제봉이 두 아들과 임진란 의병으로 나가 3부자 순절 했을 당시.

3째 고용후가 자신도 왜구와 싸우겠다는 걸 제봉은 만류했다.

셋째에게 솔가해 예안(안동) 학봉 집으로 피란 가도록 했다.

50여 제봉 가 사람들이 거기에서 전란 3년 여 동안 신세졌다.

10여 년 후, 고용후는 과거급제해 안동부사로 왔다.

모르긴 해도 아마 마음의 빚을 갚으려 노력했을 거다.

선생과 중신들의 애틋한 석별의정이 한강수에 실려 흐르는 듯하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니, 그 때 그 장면이 손에 잡힐 듯 눈에 어른거린다.

귀향 후 퇴계 선생은 통신이 불편한 터라, 1년 남짓 동안 573통의 편지를 받았다.

선생은 시를 보내면 차운해 답을 하고, 그냥 편지도 소홀하지 않고 꼭 답신을 보냈다.

퇴계 선생께서 소중한 이들과 3000여 통의 편지로 소통을 한 게 문집 등에 현존한다.

퇴계 선생은 물러남의 미학을, 아니 작두 위에 서듯 도저한 진퇴관을 추구했다.

평생 140차례 벼슬이 주어졌지만 사직상소 후 나아가지 않은 게 79차례나 된다.

나아간 61차례마저 그리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퇴계(退溪)’ 역시 지역 명인 토계와 발음이 비슷하며 냇가로 물러난다는 뜻이다.

고향 예안에 도산서당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 닦고, 제자 기르며 만년을 보낸다.

착한 사람, 많은 세상(善人多)’을 평생 꿈꾸며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삶을 살다갔다.

그래서 위인으로까지, 국내뿐 아니라 미국 영국 유럽 일본 중국 등에서도 추앙받는다.

한번은 한양 살던 맏손자 며느리가 젖이 부족해 돌이 갓 지난 증손자가 시름시름 앓았다.

손자가 퇴계선생께 편지를 보내 간청했다.

예안 퇴계의 집에서 아기를 막 출산한 여종을 유모로 보내 주십사는 부탁을 한 것이다.

하지만, 퇴계 선생은 남의 자식을 죽여 내 자식을 살리려는 것은 불가하다며 잘랐다.

결국 대를 이을 맏증손자는 목숨을 잃고만다.

퇴계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생명은 소중하다는 사실을 후세에게 가르친 것이다.

이 얘기를 몇 년 전, 국제행사장에서 들은 아프리카 대사가 놀라며 "그런 지행합일이라면 국제적 보편성을 지닐 것"이라고 상찬했다.

퇴계선생이 단순히 대학자를 넘어 성현(聖賢)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다.

남녀나 신분, 연령 간 차별하지 않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존중을 실천해서였다.

나도 몇년 전, 김병일 원장의 안내로 퇴계 선생의 종택과 태실, 묘소 등을 둘러봤다.

엄하고 드라이 할 줄로만 알았던 퇴계 선생의 인간미를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둘째날 걸으며 퇴계와 매화에 얽힌 얘기를 김병일 형은 안**교수와 나눴다.

후각이 좋지 않은 김병일 형은 도산서원 원장 겸 선비수련원 이사장에 오른지 10여 년이건만 2, 3년 전에야 매화향을 맡았단다

3년 전, 우연히 코끝을 스치는 가느다른 향을 맡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2년 전에는 서너번(?) 아련한 향을 맡는 발전을 이루고, 작년에는 10번 넘게 맡았다.

올해는 수십 번, 지금 매화는 지고 있건만...

마음을 모으면 매화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단다.

향기가 마음에 남아있는 경지에까지 오른 듯하다.

퇴계 선생의 생전, 매화 사랑은 참으로 도저해 유언으로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다.

퇴계 선생 묘소 밑에는 맏며느리 무덤이 있다.

선생은 벼슬할 때 며느리가 버선, 옷을 지어 올리면 반드시 편지와 함께 참빗, 바늘을 답례품으로 보냈다.

병약했던 맏며느리를 위해 약재를 손수 지어 내려보내기도 했다.

다정다감한 시아버지 곁에 묻어달라고 맏며느리가 유언까지 했다.

선생은 도산서원에서 15km가량 떨어진 청량산 오르기를 즐겼다.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스스로 부를 정도였다.

15세 때 숙부와 처음 올라 모두 6차례 청량산을 찾은 것으로 기록됐다.

454년 전, 사람 생명은 신분 고하를 떠나 모두 소중하다며 실천행을 했다.

그런 일은 전 세계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로 확장될 여지를 지닌다.

그게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되살리고 확산시켜야 할 선비정신의 핵심이다.

퇴계 선생을 본 받으려는 김병일은 이를 깨우치기 위해 망 80의 고단한 육신을 이끌고 1314일 간 276km를 걷는다.

퇴계의 귀향 길은 후세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길이다.

퇴계의 휴머니즘에 아프리카 대사는 "가슴이 먹먹하다"고 했다.

'천명(천명) 사상', 쉽게 하늘 마음으로 살아가면 만사형통이다.

하늘이 퇴계와 같은 성현에게만 그런 착한 본성을 내린 게 아니다.

범인인 우리에게도 하늘은 똑같은 하늘마음을 하나씩 내려주셨다.

단지 우리가 하늘마음을 모르거나 무시하고 그 마음에 떼가 묻어 흐릿한 데도 깨끗이 닦아내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하늘마음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요 피붙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리고 인간만 그렇습니까? 자연에 존재하는 만물일여로 전부 조화롭게 이웃으로 있는 거예요."

(김병일)

"이런 판에, 지위 고하나 남녀, 노소를 따지지 않고 서로 가 서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김병일은 되묻는다.

남편이 아내를 존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버지라고 해서 자식을 함부로 해서 되겠나?

요즘 슈퍼 갑짓을 하는 사람들의 비루한 생각이나 행동거지는 다 헛 거란다.

하늘마음으로 볼 때는 사람 한명 한명이 모두 다 소중한 존재라서 그렇다.

조선 중기에 당시 세계 최고의 우뚝한 인본 사상을 선생이 설파한 거다.

당시 성리학자들도 그런 이치는 모두 다 배웠다.

그 학문의 세계에서 주창하는 바가 그러하니까.

그러나 아는 것과 앎을 실천하는 건 천양지차다.

퇴계의 위대함은 배운대로 아는대로, 머리 속에 머물지 않고 아는 것을 곧이곧대로 실천으로 옮겨서다.

지행합일의 그 실천행에 많은 이가 감동하고 존경한다.

선생이 하늘의 별로 오르신지 453년을 맞는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선생을 드높이 존숭한다.

그래서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1314)은 다른 어떤 강연회장이나 어떤 책보다도 더 '살아있는 학교''살아있는 대학'이다.

그렇게 김병일은 한국의 산티아고 길과 같은 '배움의 퇴계 귀향길'을 오늘도 내일도 49일까지 걷고 또 걸을 거다.

오늘은 봉은사를 출발해 무임포(남양주 미음나루)까지 제법 길게, 발이 불어터게 19km나 걸었다.

700리 길의 완주를 각오한 어린 초중고생 17명이 단디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454년 전, 봉은사를 떠나 사흘째 선생은 한강을 거슬러 도중에 광나루에 이르렀다.

그때 선생의 문하 이담이 기다리고 있다가 찾아왔다.

스승과 제자는 역시 시담을 했다.

그러나 기대승 박순 김성일 이순인과는 달리 이담의 시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담은 일찌기 문과에 급제해 벼슬에 올랐으나 을사사화로 유배를 갔다.

선조 초에 다시 등용돼 대사성 관찰사에 보임한 바 있다.

주역 읽기를 즐겨 때로 침식을 잊기까지 할 정도로 호학했다.

선생보다 9세 연하였으나, 스스로를 낮춰 후학을 자처했다.

선생은 그를 위해 '정존재'라는 호를 지어줬다.

선생은 이담이 지어바친 송별시 3수에 차운해 답시를 내렸다.

차운시 내용 중에는 '정존재'(이담)의 말을 들으면 나의 물러나는 뜻을 이룰 수 없으므로...'라고 새길 구절도 나온다.

참으로 애틋한 사제 간 석별의 정이다.

 

이만총총(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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