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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삼성상회 설립 후 10년, 큰 뜻 품고 1947년 서울로

 

  1939년 이병철은 일본인이 청주를 제조 생산하다가 경영악화로 내놓은 대구 ‘조선양조주식회사’를 12만원에 인수했다고 회고록에 나온다.(다른 문서에는 1943년 인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대구의 양조 시장은 맥주와 청주 등 고급주는 일본인이 독점했고, 소주, 조선주, 막걸리 등의 주류는 조선인이 생산하게끔 상권이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양조장은 허가가 제한되어 있어 신규사업 진입이 쉽지 않은 사업이었다. 그리고 인수할 때가 중·일 전쟁 중이라 일본은 쌀, 석유 등 생필품은 통제했지만 허가된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술은 통제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부의 재정수익에 여타 품목보다 술에서 세금을 확보하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조장마다 정부에서 주어진 할당량만큼 술을 빚을 수 있었다. 무허가 업체가 생산하는 밀주에 대해 정부의 단속이 심하여 관공서의 인·허가를 받은 양조장은 재고가 없을 정도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러나 해방이 된 후 미군정청이 쌀 공급을 제한하자 양조의 원료인 쌀을 구할 수 없어 생산이 한동안 중단되는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 후에 쌀 공급이 재개되면서 이병철의 조선양조장도 ‘월계관’이라는 상표로 청주를 생산했다. 이 청주는 인기가 좋아 영남지방은 물론 서울까지 진출했다. 조선양조가 생산 판매한 제품은 청주뿐 아니라 삼성소주, 삼성포도주, 삼성위스키 등 약 9종류였다.

 

  사업장이 안정되자 이병철은 1945년 9월 대구에서 기업체를 경영하는 유지들로 구성된 친목단체 ‘을유회’에 가입하면서 대구상업계의 중심인물로 성장했다. 을유회는 1945년 10월 대구의 지방지 ‘조선민보’를 인수하고 ‘대구민보’로 개칭하여 신문을 발행했다. 이때 이병철은 총무국장으로 잠시 근무했다.

 

1939년 일본인이 내놓은 양조회사 인수
청주·소주 등 9종 생산… 서울까지 진출
지역 기업 유지들 모임 ‘을유회’ 가입도

1947년 대구 모든 사업장 경영인에 맡기고
가족과 서울 혜화동에 새 거처 마련
1953년엔 풍국주정 설립, 경영은 매형이

 

조선양조장에서 생산한 청주 월계관 상표.
조선양조장에서 생산한 청주 월계관 상표.

 

# 결심- 더 큰 장사를 하자

  해방 후 참담한 한국경제의 현실을 본 이병철의 가슴 속에는 늘 무역업을 통한 생필품 공급의 필요성을 품고 있었다. 변변한 생산시설 하나 없는 나라에서 서민을 위한 물자 공급은 늘 부족한 상태였다. 결심이 서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이병철 경영의 장점 중 한가지이다. “그래, 무역을 하기에는 대구도 좁다. 무역업은 서울과 같은 큰 도시에서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서울로 가자.”

 

  1947년 5월, 대구의 모든 사업장을 경영인에게 맡겨두고 이병철은 가족을 데리고 서울 종로구 혜화동 125에 새 거처를 마련했다. 이병철은 1937년 중국 대륙을 누비면서 마음속에 품어온 ‘기업보국’ 실천을 위한 닻을 마산과 대구를 거쳐 마침내 대한민국 최대 도시 서울에 내렸다. 이병철이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한 지 꼭 10년 만이다.

 

이병철 처가가 있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마을 전경./달성군청/
이병철 처가가 있는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마을 전경./달성군청/

 

# 왜 대구에서 시작했을까

  이병철은 삼성상회를 대구에 설립했다. 첫 사업인 정미소와 자동차 사업을 한 고향 인접 마산도 아니다. 당시 대도시인 서울, 부산도 아닌 왜 대구에 설립했을까. 이병철 본인이 밝힌 회고록의 내용이다.

 

  “삼성상회 주 사업 업종은 무역업이다. 주력 품목은 청과물과 건어물 그리고 잡화이다. 이병철은 대구의 사과와 포항의 건어물을 중국 심양과 장춘 등 만주지역에 수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무역은 수출 물량 확보와 운송이라는 두 가지를 충족하는 지리적 조건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유로 경북지역 교통의 중심이자 물자의 집산지로 우수한 지역인 대구시를 선택했다.”

 

  경영학자와 기업 연구가들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삼성그룹의 설립 배경과 지역, 사업 품목 등을 매우 중요한 연구 주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병철과 대구 창업’은 세미나 등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회고록의 내용 외 설득력 있는 내용 3가지를 요약해 보았다. 하지만 당사자가 생존하지 않으니 명쾌한 해답은 알 수 없다.

 

#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 첫 번째 이유

  이병철의 처가댁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병철은 1926년 12월, 두 살 위인 경북 달성군 출신 박두을과 결혼했다. 신부 집안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대구 달성의 명문이자 지역 유지였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 회고록에 박두을이 아들을 보고 “너 아버지에게 시집이라고 왔더니 집도 좁고 그렇게 가난해 보였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결혼 당시 주변에서도 신랑 쪽이 너무 기울어진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의령군 4대째 천석꾼 부자였던 이병철 집안을 가난하게 본 것으로 볼 때 신부 쪽의 경제력을 짐작할 수 있다. 사업을 할 때 고향이나 처가댁의 연고지도 무시할 수 없는 선택지 중의 한 곳이다. 첫 번째 이유를 뒷받침하는 부분적인 내용도 있다. 이병철의 처조카 되는 대구 달성 출신 박준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 “이병철이 마산에서 사업에 실패해 대구로 왔을 때 정착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박준규의) 도와 주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 두 번째 이유

  지인과 친인척이 대구에 많았기 때문이다. 이병철의 고향 의령군민의 생활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령 북부 지방의 생활반경은 대구와 가까워 대구시장을 오고 간다. 의령 남부지방은 진주와 마산을 많이 오고 간다. 당시 대구지역에 의령 출신이 제법 거주했고 왕래도 많았다. 대구에서 경제 활동하는 고향 출신이나 지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장사하는 지인이 많으면 물품 공급이나 거래가 쉽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도 이병철에게는 대구를 근거지로 한 이유가 될 것이다.

 

# 대구에서 삼성상회 설립, 세 번째 이유

  전략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정미소와 부동산 사업 정리 후 넉넉하지 못한 자본금이지만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사업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구는 도시 규모나 물자 운송 교통도 그렇게 나쁜 환경은 아니다. 이병철이 마산 사업체를 청산한 후 남은 자본으로 임대료나 인건비 등 창업자금이 많이 소요되는 서울, 부산이 아닌 대구는 어느 정도 예산 투입이 적정하였을 것으로 판단했다.

왜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했을까? 왜 대구가 삼성을 키운 도시가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과 의견은 독자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

 

풍국주정에서 생산한 사이다와 오렌지 주스 신문광고. 조선일보 1956년 4월 29일자.
풍국주정에서 생산한 사이다와 오렌지 주스 신문광고. 조선일보 1956년 4월 29일자.

신문광고를 확대한 모습. 가운데 풍국주정(붉은 원)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신문광고를 확대한 모습. 가운데 풍국주정(붉은 원)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1954년 당시 풍국주정 대표 명함. 대표 취체역(取締役)은 오늘날 대표이사란 뜻이다./허순구 가족/
1954년 당시 풍국주정 대표 명함. 대표 취체역(取締役)은 오늘날 대표이사란 뜻이다./허순구 가족/

 

# 이병철이 만든 사이다, 오렌지 주스

  이병철은 1939년 조선양조, 1948년 4월 조선효모를 인수했다. 1953년 소주 원료와 주정을 생산 판매하는 풍국주정을 대구에서 설립했고 이병철의 매형 허순구가 대표이사로 경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는 삼성의 사이다와 오렌지 주스 판매 이야기는 풍국주정에서 생산한 것은 분명하다.

 

〈이병철의 한마디〉 사업을 운영할 때는 항상 국내외 정세의 변동을 적확하게 통찰해야 한다.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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