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메뉴 건너뛰기

회원마당

커뮤니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게시글 수정 내역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진주 서북부 상봉동은 비봉산을 품고 있는 동네이다. 이곳에 ‘봉(鳳) 알자리’가 있다. 관광객에게 널리 알려진 곳도 아니고 인터넷 검색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이다. 진주에 거주하는 중장년층 이상은 대부분 아는 곳이다. 이전에는 출입문도 없어 큰 나무 아래서 바둑도 두고 풀밭 위에서 씨름도 하였다. 지금은 울타리가 세워져 출입하기가 곤란하다. 뚜렷한 관리 주체가 없는지 담장이나 잡초 등이 효율적으로 관리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1942~1945년 구인회가 거주했던 상봉동
진주 강씨 흥망과 봉황 관련 전설 내려와
봉황 살았다는 대밭 많아 ‘대롱골’ 지명도

날아간 봉황 다시 부르려고 만들었다는
‘봉 알자리’엔 정치인·기업인 등 다녀가
당시 도심 가깝고 환경 좋은 최고 명당터

 

비봉산과 진주 상봉동 풍경./진주시청/
비봉산과 진주 상봉동 풍경./진주시청/

 

# 진주 상봉동 봉 알자리

진주는 옛날부터 진양 강씨 집안에 인물이 많이 나고 진주 대봉산(현 비봉산) 아래 거주하며 권세를 누렸다. 그 이유를 대봉산 위의 봉암(바위)의 정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 조정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봉암을 깨트리자 바위 속에 있던 봉황이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진양 강씨 문중에 인물이 나지 않고 쇠퇴하자 봉황을 다시 부르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봉 알자리’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다른 전설은 지금의 진주시 상봉동과 봉곡동이 한 동네일 때 이곳에 큰 바위와 작은 바위가 쌓여 있었는데, 이 모습이 봉황과 비슷한 형태였다.

 

고려시대 도인이 지나다 이 바위를 보고 강씨의 번성함은 이 바위에 있다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신하가 임금에게 강씨가 권력을 차지하려고 한다며 강씨의 모함을 고하자 임금은 명을 내려 바위를 깨트렸고, 대봉산(大鳳山)의 이름도 봉이 날아가 버렸다는 비봉산(飛鳳山)으로 바꾸어 버렸다. 봉이 물을 마시던 연못도 솥에 넣고 삶는다는 ‘가마못’으로 고쳤다는 전설이다. 최근 봉 알자리에는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역사학자들이 소리없이 다녀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추측하건대 이곳을 찾는 목적이 봉황이라는 신비한 길조와 관련되어 경건한 마음으로 봉황을 그리면서 새로운 결심을 하여 심기일전의 충전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금의 봉 알자리./이래호/
지금의 봉 알자리./이래호/

 

# 봉황과 대나무

봉황은 대나무 숲에서 자란다. 봉황은 백년에 한 번 핀다는 대나무 꽃과 열매를 먹고 산다. 대나무 숲이 많은 곳을 대밭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진주에는 대밭이 많았다. 경남도립문화예술회관 앞에도 대밭이 있고, 촉석루 맞은 편도 대나무 숲이다. 진주여자고등학교 교정에도, 비봉산 산책로에도 대나무가 많이 있다. 상봉동에는 대나무가 많은 ‘대롱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진주 역사의 해박한 지식을 가진 진주문인협회 회장과 경상국립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명길 박사는 ‘동기 이경순전집’에 진주의 대밭을 이야기하였다. “진주농림학교 후문 길은 낭만의 길인기라, 탱자 울타리가 있고 푸른 대밭이 오리길이나 되어, 그리고 강변으로 백사장이 쫘악 있었지.” 이명길 박사의 호는 기리이다. 키가 커서 기린을 닮았다고 붙여진 호이다. 필자가 시조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내 키가 이렇게 커도 비온 뒤 죽순 사흘 큰 키도 되지 않는다, 자연과 맞서 싸우려 하지 말고, 사람을 만나면 위, 아래 구분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요즘은 도시의 편리를 위해 도로를 내고 설치물을 세우다 보니 그 대나무의 세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진주에는 봉황이 살았던 전설을 뒷받침하듯 대밭이 유달리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진주 상봉동 대롱골이 보이는 풍경./상봉동지/
진주 상봉동 대롱골이 보이는 풍경./상봉동지/

 

# 진주 역사의 시작 상봉동

“진주 역사의 시작은 상봉동이다.” 이 말은 2015년, 최진수 상봉동지편찬위원장과 동민들이 협력하여 출판한 ‘상봉동지’의 서명이다. 이 책은 “진주는 비봉산을 배산임수로 옛날부터 촌락을 이루고 살아오면서 터가 좋아 관공서가 많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비봉산에는 많은 사담이 전해오고 있지만, 특히 봉황과 진주 강씨의 흥망과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고 상봉동을 소개하였다. 일제강점기 1925년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진주의 세가 약해진 것과 관련하여 봉황이 또 다른 도시로 떠났다는 것까지 전설과 연결되고 있다. 다른 도시도 마찬가지이지만 진주의 지명이나 산에는 봉황의 봉(鳳)이 들어간 곳이 유달리 많다. 비봉산, 봉원·봉래초등학교, 봉산사, 봉 알자리, 상봉동, 봉수동, 봉곡동 등이다. 지금의 진주여고 옛 이름도 한때는 봉산고등여학교였다.

 

# 구인회가 거주한 상봉동

구인회가 진주에서 장사를 한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된 1935년, 지수면에서 진주시 수정동으로 이사를 왔다. 마루를 중심으로 큰 방 3개가 배치되어 있는 주택이다. 1936년 구태회가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함께 거주하였다. 장남 구자경과 동생 구평회도 1939년 진주공립중학교에 입학하여 모처럼 식구가 진주에 모여 사는 여유로움을 가졌다. 1942년 자녀들이 성장하자 상봉동 봉 알자리 인근에 공부방이 2개나 딸린 한옥을 구입하여 이사를 하였다.

 

당시 상봉동은 도심지와 가깝고 교통과 주변의 거주 풍경이 매우 아늑한 곳이었다. 진주에서 경제력이 좋은 분들이 많이 거주한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봉 알자리가 있는 상봉동은 신도시에 밀려 개발이 정체되고 있다. 긍정으로 생각하면 도심 속에 이 정도 아늑한 추억을 가진 환경을 가진 곳은 없을 것이다. 뒤로는 비봉산, 앞으로는 남강이 위치한 곳으로 최고의 명당 터이다. 도시 재생지역으로 선정되어 상봉동이 다시 한번 부활할 것이라 여겨진다.

 

옛 가마못터에 있는 포은 정몽주 유적비./이래호/
옛 가마못터에 있는 포은 정몽주 유적비./이래호/

 

구인회가 거주한 진주 상봉동 자택./구인회 회고록/
구인회가 거주한 진주 상봉동 자택./구인회 회고록/

 

#진주의 경제·문화 유산, 상봉동 구인회 고택

진주 시내 구인회가 거주하던 동네는 당시에 일본식 지명인 봉산정이라 하였다. 1949년 상봉동동, 상봉서동으로 분리되었다가 2013년에 다시 통합하여 상봉동으로 부르고 있다. 구인회 자서전에서 밝혀진 자료와 연도별 활동기록을 살펴보면 구인회의 상봉동 거주는 1942년부터 1945년 9월까지이다.

 

구인회의 진주 고택은 봉 알자리와 진주여고 중간 지점으로 추측이 된다. 집에서 가까운 봉 알자리를 자주 산책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LG그룹 2대 회장)이 이곳에서 진주중학교를 다녔다. 구인회의 장손인 구본무(구자경의 장남) LG그룹 3대 회장은 1945년 2월 출생이다. 구자경의 부인이 진주시 대곡면 본가로 가서 구본무를 출산하였지만 이곳은 구본무의 생가라 할 수 있다. 1945년 9월, 구인회는 부산 서대신동 3가 513번지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1945년 11월 부산에서 조선흥업사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한 후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LG그룹을 창업하였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봉 알자리 주변의 구인회 고택과 중앙시장의 구인회 포목상점터를 이 기회에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찾았으면 한다. 더불어 비봉산과 봉 알자리, 가마못, 비봉루, 포은 정몽주 유적비, 진주여고, 진주중·고등학교 등 코스를 잡아 ‘걸어서 만나는 진주 경제·문화여행’을 추천하고 싶다.

 

<구인회의 한마디> 공경함으로 자신을 다스리며, 검소함으로 가정을 다스려라.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관광사업본부장
이래호 전 경남개발공사 관광사업본부장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4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6. 진주에서 포목장사 하겠습니다 file 아우라 2022.03.18 33
43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5. 서울 유학 후 다시 고향에서 file 아우라 2022.03.11 32
42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4. 구인회와 지수초등학교 file 아우라 2022.03.07 39
41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3. 구인회와 한학 이야기 file 아우라 2022.03.07 29
»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2. 진주 상봉동과 봉 알자리 file 아우라 2022.02.22 13
39 [부자 氣받기] 금성 구인회편 - 01. 구인회의 흔적을 찾아 - 진주와 지수면 file 아우라 2022.02.15 12
38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14. 뿌리깊은 선비의 고고함 가진 경영인 file 아우라 2022.02.08 12
37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13. 내 나이 56세, 다시 시작하다 file 아우라 2022.02.08 13
36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12. 조홍제와 제일모직, 그리고 바둑 file 아우라 2022.01.25 40
35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11. 조홍제의 제일제당 창업이야기 file 아우라 2022.01.18 10
34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10. 이병철을 만나다, 삼성물산 설립 이야기 file 아우라 2022.01.11 9
33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9. 최초의 사업, 마산 육일공작소 file 아우라 2022.01.04 9
32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8. 조홍제, 선비보다 상인의 길을 가다 file 아우라 2021.12.28 13
31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7. 함안으로 돌아온 선비 지식인 조홍제 file 아우라 2021.12.21 9
30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6. 동방지성을 만든 일본 유학 file 아우라 2021.12.14 16
29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5. 어릴 때부터 싹튼 민족의식 file 아우라 2021.12.07 7
28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4. 대식 선생 조홍제, 신학문에 눈 뜨다 file 아우라 2021.11.30 9
27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3. 조홍제와 한학 이야기 file 아우라 2021.11.23 21
26 공부하고자 회원가입을 하였습니다. 2 매헌 2021.11.18 19
25 [부자 氣받기] 효성 조홍제편 - 02. 조홍제의 고향 함안과 함안사람 file 아우라 2021.11.15 1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 5 Next
/ 5
후원참여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후원참여
연학
후원회
자원봉사참여
회원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