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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실재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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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한학연구원장

        동방한학연구원장

 

경약신명(敬若神明) - 신명처럼 존경한다

 

  몇 년 전 어떤 대학원생이 강의 끝나고 나면, 번번이 책을 콱 덮어 팍 밀쳐버렸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랬다. 어느 날 강의 중간 쉬는 시간에 한참을 쳐다보았더니, 눈치를 챘는지 미안해했다. 어린 학생도 아니고, 상당한 경력이 있는 중견교사였다.

 

  그래서 필자가 상당히 길게 빙 둘러 훈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 도산서원(陶山書院) 가 봤지요? 도산서원의 아랫 부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께서 손수 지어 자신이 60세 때부터 학문 연구하고 제자 가르치던 도산서당(陶山書堂)입니다. 마루 한 칸, 방 한 칸, 골방 한 칸으로 되어 있는데, 방 한 칸은 연구실 겸 도서실인데, 선생께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그 방 안에서 발을 뻗거나 눕지를 않으셨어요. 왜? 사방에 책이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무생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선생은, 책을 생명체로 생각하고 신명(神明)처럼 공경했습니다. 그 속에 성현이나 선배 학자들의 말씀이 들어 있는데, 그 앞에서 어떻게 감히 발을 뻗거나 눕는 등 함부로 행동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퇴계선생은 책만 생명체로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라, 매화는 ‘매화 형님[梅兄]’, 연꽃은 ‘깨끗한 친구[淨友]’,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 등은 ‘절개 있는 벗들[節友]’라고 했습니다. 모든 식물에 인격을 부여한 것이지요. 사람만 존귀한 것이 아니고, 식물도 소중하고, 무생물도 소중하고, 천지만물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퇴계선생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남명선생, 율곡선생 등 모든 유학자들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다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곧 모든 물건에는 정신[物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그 가운데서 가장 영적(靈的)인 존재인 것입니다.

 

  옛날 중국 수(隋)나라 때 서예가인 지영(智永)이란 분은, 자기가 평생 쓰던 모자라진 붓을 다 모으니, 여덟 섬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여덟 개의 ‘붓 무덤[筆塚]’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주인을 위해 평생 글씨를 쓰게 도와준 붓을 다 썼다고, 차마 그냥 쓰레기로 던져 내버리지 못 한 것입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글에, “책을 밟지 말아라. 깔고 앉지 말아라. …….” 등등의 훈계를 남겼습니다. 책은 단순히 인쇄한 물질이 아니라, 소중한 정신이 담긴 것이니,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책을 소중히 해야 공부가 됩니다.

 

  대학원에 다니면 일반사람들이 대단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옳은 줄 알고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전공학문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책을 소중히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책을 어떤 보물보다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책 한 권은 어떤 명품(名品)보다 다 귀중한 것입니다. 책 한 권은 1만 원, 2만 원 정도 주면 사지만, 그 속에는 그 저자의 한평생의 학문과 사상과 경험과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 저자가 60년 70년 공부하고 경험해서 얻은 지식과 교훈을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단돈 1, 2만원에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 세상에서 책보다 더 귀중하면서도 싼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간혹 별로 볼 것이 없어 잘못 샀다고 생각하는 책도 그 가운데서 한두 마디만 건져도 책값보다 몇 배로 큰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책을 천대하면 공부가 안 됩니다. 책을 던지면, 안 됩니다. 책을 깔고 앉아도 안 됩니다. 책을 밟거나 뛰어넘으면 안 됩니다. 책을 베고 자도 안 됩니다. 책을 접어서도 안 됩니다. 책 위에 다른 물건을 얹어서도 안 됩니다. 물론 책을 더럽혀도 안 됩니다. 혹 책이 더럽혀졌거나 손상되었으면, 즉각 보수해야 합니다.

 

  내 자랑이 되겠지만, 나는 책을 지극히 소중히 생각합니다. 책을 밟거나 깔고 앉는 것은 생각도 못 합니다. 길 가다가 대학생들이 써 붙인 대자보도 안 밟고, 길 위의 교통 규칙도 안 밟습니다. 글자가 인쇄된 종이는 휴지로도 안 씁니다. 책이나 글자를 예사로 자근자근 밟는 학생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책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쓰는 지우개나 책받침 등도 다 귀한 사람처럼 대합니다”

 

대학원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듯 했지만, 숙연해졌다.

 

[*. 敬 : 공경할, 경. *. 若 : 같을, 약. *. 神 귀신, 신. *. 明 : 밝을,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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