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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희화학, 1951년 봄 플라스틱 사업 진출
1954년 연구개발 성공한 럭키치약 생산
허준구 판매 총책임자로 제품 공급 나서
진입 힘든 시장 ‘외상 공급 방식’ 도입
상인들 부담없이 취급하며 판매 ‘쑥쑥’

 

해방과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 당시 국내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도로였다. 운반 도중이나 크림을 차에 싣고 내릴 때 크림통끼리 부딪쳐 뚜껑이 깨어지는 제품도 많았다. 이로 인해 크림이 반품되는 등 매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락희크림의 명성과 이미지에도 좋지 않았다. 깨지지 않는 크림통 개발이 절실하였다.

 

# 플라스틱사업에 진출하다

구인회는 구태회 전무에게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개발을 연구하라”고 지시를 하였다.

구태회는 국내에는 관련 도서가 없어 형님 친구 조홍제를 통하여 일본어 서적을 구입, 탐독하여 플라스틱의 실체를 파헤쳤다.

플라스틱 제품은 폴리스틱이라는 ‘원료’, 플라스틱을 찍어내는 ‘사출성형기’, 만들고자 하는 제품 모양틀인 ‘금형’, 이 3가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금형만 바꾸면 크림 뚜껑은 물론 플라스틱 빗, 비눗갑, 칫솔 등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용품도 플라스틱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락희화학은 1952년 사출성형기를 도입, 플라스틱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한 회사가 되었다. /LG화학홈페이지/
락희화학은 1952년 사출성형기를 도입, 플라스틱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한 단계 더 성장한 회사가 되었다. /LG화학홈페이지/

그러나 플라스틱 사업은 기계 도입과 원료 구입에 특별히 많은 자본이 필요하였다. 가지고 있는 자금이 많이 부족하여 확실히 수익이 보장되는, 이병철이 제안한 제당사업도 뒤돌아볼 여건이 아니었을 정도였다. 임직원 모두가 전쟁의 혼란 속에 대규모 투자에 부정적 생각이었다. 구인회는 큰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업은 남이 손대기 전에 해야 빛나는 법이다. 하자.”

 

# 부산 범일동 공장 허학구의 경영 참여

1951년 봄, 락희화학은 플라스틱 사업에 진출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부터는 부산시 범일동에 새 공장터를 준비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1952년 봄, 또 한 사람의 허씨 집안 사람이 락희화학에 참여한다.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 형사를 폭행하고 퇴학을 당한 허씨 8형제 중 키가 가장 큰 허만정의 차남 허학구이다. 허준구의 바로 위 형으로 허학구에 대한 이야기는 12회쯤 소개할 계획이다.

플라스틱 생산을 위한 락희화학 부산 범일동 공장의 설립 현장에는 구자경과 허학구가 있었고, 공장건설 자금 확보 업무는 허준구가, 그리고 자금 운용과 기획은 구정회가 맡았다.

제품 생산을 하거나, 공장 기계를 수리하거나, 공장을 관리하는 모든 일은 허학구와 구자경의 몫이었다. 허학구는 구자경보다 나이가 13살이나 많았지만 아버지 허만정의 가르침과 동업 정신의 불문율을 조금도 문제되지 않도록 하였다. 범일동 공장일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형 허학구와 구자경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위로한 사람이 허준구였다.

구자경은 장손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구인회에 의해 혹독한 일과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였다. 허준구는 가끔 구자경을 부산 시내에 불러내어 위로하고 격려도 하였다.

구자경은 회고록에서 “당시 힘들 때 허준구가 나를 데리고 부산 비어홀에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비어홀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가끔씩 답답한 마음을 노래를 부르면서 달랬는데, 구자경 회장의 애창곡은 ‘애모’와 ‘가는세월’로 알려져 있다.

 

# 허씨 집안의 자본 투자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발효되었다. 각종 정부기관이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갔다. 공장 운영, 인·허가 등 서울로 가서 받아야 하는 게 많이 있었다. 구태회 전무가 서울에 지사 사무실을 개설하고 부족한 일손을 도울 직원을 구인회 사장에게 요청하였다. 구인회는 허준구의 동생 허신구를 추천하여 서울로 보냈다. 허신구에 대한 이야기는 15회쯤 소개할 예정이다.

허씨 집안의 구씨 회사 최초 투자는 조선흥업사가 설립된 후 1946년 초 아마쓰크림 서울 판매 시작 시점으로 볼 수 있다.

2차 투자는 럭키크림 개발 및 생산, 판매를 위한 시설자금 구입 때로 볼 수 있다. 3차 투자는 1951년부터 시작한 플라스틱 사업 진출을 위한 과정에서 사출성형기기 도입 및 범일동, 부전동, 연지동 등으로 이어지는 공장 증설에 필요한 자금의 조달에서 투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허씨 집안은 자금을 투입하였다. 구자경의 회고록에도 공장을 짓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허씨 집안에서 지분 확보를 위해 자금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락희화학에서 연구 개발하여 국내 최초로 생산한 럭키치약의 다양한 광고, 미국제품과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1955년 6월 10일 동아일보, 1955년 7월 15일 동아일보. 1955년 8월 3일 조선일보, 1957년 1월 1일 국제신문 신년축하 광고이다.
락희화학에서 연구 개발하여 국내 최초로 생산한 럭키치약의 다양한 광고, 미국제품과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1955년 6월 10일 동아일보, 1955년 7월 15일 동아일보. 1955년 8월 3일 조선일보, 1957년 1월 1일 국제신문 신년축하 광고이다.

럭키치약 이동 광고 차량./구인회 회고록/
럭키치약 이동 광고 차량./구인회 회고록/

# 치약판매 총책임자 허준구 상무

락희화학이 야심차게 연구 개발하여 1954년 럭키치약이 생산되었다. 구인회는 망설임없이 럭키치약 판매 총책임자로 허준구 상무를 지목하였다.

허준구는 영업팀을 데리고 리어카에 제품을 싣고 시장과 상점들을 찾아 다니며 제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한국인의 인식에 ‘치약은 미국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 치약과 칫솔 도매상인도 럭키치약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주지 않아 시장 진입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아무리 좋은 원료로 만든 제품이라도 ‘국내산 제품은 품질이 나쁘다’는 선입견에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다. 시장의 반응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허준구는 먼저 물품을 공급하고 3개월 후에 물품 대금을 결제하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물건값을 받지 못할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외상으로 물건을 공급한 결과 상인들은 부담이 없어 럭키치약을 많이 취급하였다.

치약 시장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사용해보니 럭키치약이 품질도 좋다는 소비자의 입소문도 나게 되었다. 미국 제품과 비교해도 차이가 없다는 홍보에 판매가 순조롭게 성장하였다. 시장의 유통 원리를 잘 알고 있는 허준구가 도매상과 협력하여 소매상의 요구조건을 수용하는 현장 밀착형 영업 전략이 성공한 것이었다.

 

럭키치약을 개발한 구평회 회장은 구인회 6형제 중 다섯째로 LG그룹의 창업 공신이다. 한국무역협회장, 2002년 월드컵축구유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대표 국제전문가였다./송강 구평회 화보집/
럭키치약을 개발한 구평회 회장은 구인회 6형제 중 다섯째로 LG그룹의 창업 공신이다. 한국무역협회장, 2002년 월드컵축구유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대표 국제전문가였다./송강 구평회 화보집/

 

# 구평회가 개발한 김치냄새 잡는 럭키치약

치약은 매일 사용하는 소모품으로 치약 시장 진입 시 수익이 충분하리라 판단하였다. 입안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체에 해롭지 않은 물질로 만들어야 하는 복잡한 성분의 결합이 필요하다. 치약 개발 역시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하였다. 치약을 넣는 튜브 제조도 해결하여야 할 문제였다.

구인회는 구평회에게 “김치와 된장을 먹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한국 사람의 기호에 맞는 치약을 만들어라”고 지시를 내렸다. 매일매일 사용하는 치약 튜브가 쪼그라드는 만큼 비례하여 락희화학의 금고는 부풀어져 갔다.

 

이래호 LG그룹 구인회 회장과 기록 저자
이래호 (구인회 LG그룹 회장, 기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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