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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실재서당

        동방한학연구원장

 

학혐도박(學嫌徒博) - 학문이 한갓 넓기만 한 것은 싫어한다

 

  학문을 연구하여 독특한 체계를 세워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수준이 되면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라고 일컬으며, 집 ‘가(家)’자를 써서 표현한다. 크게 이루면 “대가(大家)가 되었다”라 하고, 아직 자기만의 체계를 세워 새로운 이론을 내놓을 정도에 도달하지 못하면 “성가(成家)가 안 되었다”라고 표현한다.

 

  왜 학문의 수준 정도를 나타내는데 집 ‘가(家)’자를 쓸까? 학문을 해서 자신만의 체계를 세우는 것이 집을 짓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목재를 베어서 아무리 많이 다듬어도 집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벽돌을 아무리 많이 찍어내도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짓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목재와 목재를 이리저리 짜 맞추고 그 사이에 흙 등 다른 재료를 섞어서 한 채의 집을 이루는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먼저 집의 설계도를 그린 뒤 그 설계도에 따라서 각종 건축 자재를 적절하고 서로 짜 맞추어야 집이 된다. 자기가 원하는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를 그리는 과정에서부터 자기의 생각을 거기에 넣어야 한다.

 

  학문하는 것도 개별적인 지식이 기초는 되지만, 개별적인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자(漢字)를 많이 아는 것과 한문학(漢文學)을 연구하는 것은 다르다. 영어 단어를 아무리 많이 외워도 영문학 한다고 할 수 없다. 필자가 아는 어떤 교수는 미국에 13년 동안 유학하여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말을 듣는데도, 논문을 못 써서 정교수 진급을 못 하는 사람이 있다. 개별적인 지식을 체계를 세워 구조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어떤 개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취사선택하여 경중을 조정해서 논리에 따라 구조를 짜서 한 편의 글을 써야 논문이 된다. 그 분야의 수준 높은 연구업적이 축적될 때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일컬어지고, 아주 수준 높은 연구업적이 축적될 때 ‘대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공자(孔子)께서도 논어(論語)에서 “글에서 널리 배우고, 그것을 예법으로 요약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라고 했다. 학문을 한다면, 먼저 앞 시대 사람이 남긴 글을 널리 배워야 한다. 그런 뒤에 예법(禮法)으로 요약해야 한다. 여기서 예법은 곧 ‘규칙’, ‘이치’이다.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차운(次韻)’이라는 시가 있다. 학문이 한갓 넓기만 하고 정밀하지 못 한 것 싫어하나니[學嫌徒博不精微,], 누런 큰 고니가 하늘 빙빙 돌면서 스스로 날기 연습하는 것 보게나[黃鵠摩天自習飛.]. 묻노니, 한평생 길이길이 여관을 돌아다니는 것과[爲問一生長逆旅,] 일찍 사람의 집인 인(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떠한지를.[何如仁宅早來歸.] 고니가 이미 잘 날 줄 알지만 계속 날기 연습을 하듯이, 일가를 이루거나 대가가 되거나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단지 널리 배우기만 해서는 안 되고, 정밀하게 살펴 논리를 잘 세워야 학문이 되는 것이다.

 

* 學 : 배울 학. * 嫌 : 싫을 혐.

* 徒 : 한갓 도. 무리 도. * 博 : 넓을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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