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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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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한학연구원장

 

숙독완미(熟讀玩味) - 자세히 읽고 그 뜻을 맛본다

 

  수그러들 줄 몰랐던 더위도 처서(處暑)가 지나니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명칭으로 볼 적에는 8월 7, 8일경에 드는 입추(立秋)가 가을의 시작이지만, 가을의 기운은 처서 때부터 시작된다. 모든 초목은 처서가 되면 생장을 멈추고, 저장의 단계로 들어간다.

 

  서늘해지면 책 읽기에 좋으므로,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국가에서 독서의 달로 정해 놓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아 책 읽기에 좋을 것으로 보고 정했지만, 이상하게도 각 공공도서관에서 통계를 낸 것을 보면, 1년 중 도서 대출이 가장 적은 달이 9월이라 한다.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놀기에는 더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산들바람이 불고 오곡이 풍성하게 익고 산과 들이,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려고 하는 이런 풍경을 보면, 집이나 도서관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기보다는 밖에 나가고 싶은 충동이 더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말 책을 읽으려면, 읽은 시간과 장소를 가려서는 안 된다. 퇴계(退溪) 선생께서 그 아드님 이준(李寯)에게 준 서신에서 이렇게 훈계하셨다. “책 읽는 데 어찌 장소를 가리겠느냐? 고향에 있거나 서울에 있거나 할 것 없이, 오직 뜻을 세우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름지기 자신을 매우 채찍질하여 날마다 힘써 부지런히 애써 공부를 해야 한다. 어정어정 헛되이 세월을 보내서는 안 된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방문하니, 책상 위에 ‘시경(詩經)’이 펼쳐져 있었다. 우계가 묻기를 “금년에 책을 얼마나 읽었소?”라고 하자 율곡은 “금년에 사서(四書)를 아홉 번 읽었고, 이제 ‘시경’을 시작하여 왕풍(王風)에 이르렀소.”라고 했다. 우계는 이 말을 듣고 탄복하고 부러워했다. 이 이야기는 우계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율곡 같은 대학자가 유학이나 한문학의 기초가 되는 사서삼경을 끝없이 반복해서 읽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한문학 대가인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이 20대 중반 일제 말기에 당시 한문학계의 대가로 일컬어지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 댁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그때 위당은 붓으로 ‘시경’을 베끼고 있었다. 연민은 너무 뜻밖이라 “선생님! 지금 무엇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시경을 베끼고 있는 중이네.”, “선생님 같은 대가께서 시경을 베끼다니요?”, “아니야. 사서삼경 등 기초가 되는 고전은 밥 먹듯이 매일 매일 계속 공부해야 돼.”라고 대답했다. 공부에는 기본적인 공부가 중요하다. 아무리 대가라 해도 기본 공부가 튼튼하지 않으면 그 학문이 대성할 수가 없다.

 

  요즈음은 워낙 바쁘다 보니, 독서의 달이 되어도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일이 거의 없다. 학문의 기본은 결국 독서와 궁리다. 시간 장소 가리지 말고, 깊이 있게 읽어 책 속에 담긴 뜻을 차분하게 맛보기 바란다.

 

* 熟 : 익을 숙. * 讀 : 읽을 독.

* 玩 : 즐길 완. * 味 : 맛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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